신앙인으로 살아가기 -2007/4/21(토)

작성자
dolphin
작성일
2025-10-06 11:48
조회
115
그리스도인이 된 동기는 각 사람마다 다 다를 터이다.
또한 지금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오늘도 왜 그리스도인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현재를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어떤 팔순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강론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하지만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도 큰 공덕이 될테니 꼭 참석하며 활동할수 없으니 후원회 마다 천원씩 용돈을 다 낸다고 한다. 여든이 넘었으니 살아봐야 죄만 더 짓게 될테니 세상에서 잘먹는것도 귀찮고 배고프지 않게 먹을수만 있다면 복이라며 그저 천당가는 것 하나 바라고 천주님 믿고 기도하며 살아 가신단다.

입교동기 중에는 보통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할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과 용기를 한층 더 느끼게 된다 하겠다.

신앙인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이 달라진 것이 없다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하는 행위나 대화를 보고 듣는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터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이미 그리스도화 되었다고 할 것이다. 나로 인해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의 다른 교우의 이미지를 흐리지 않았는가를 하루하루를 성찰하고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나를 완성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외인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또한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이유를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 두고
있다. 천주교 신자든 개신교 신자든 간에 거의 입버릇처럼 “주님을 믿습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믿고 있는걸까?
정말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이 생활로 증명되어야 한다.
많은 신자들 가운데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오히려 비 그리스도인보다 더 바로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된다. 우리가 믿는게 뭔지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

개신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교회 가운데 하나로 “종교친우회(일명 퀘이키교: Friends of Religious Society)가 있다. 이 교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보통 의사결정이 철저한 만장일치로 이루어진다는데 있다. 진리가 반드시 대다수에게만 있는 법은 없기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결정을 내릴 수도 없지만 한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낸다. 그래서 더욱 만장일치 원칙이 필요하다고 한다. 최소한 퀘이커 교도들은 책임질수 있는 말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 친우회의 이런 입장을 볼 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를 그대로 실천해 나가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는 생활이 필요할 것 같다.

천주교 개신교를 합한 그리스도인들이 천만은 넘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을 천만이 넘는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면 우리나라 꼬라지가 이 모양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이 현실에 대한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실제 교회는 양적인 성장은 해 왔지만 그 질적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이다.
타종교 비판, 배타, -설악산을 볼때 내설악에서 본 것과 외설악에서 본 것이 다를수 있으나 같은 설악산이다.-진리는 하나이다.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결코 천주교에 입교 않겠다는 사람-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단체에 근무한 사람이야기
신부, 수녀님--; 자신의 잘못을 인정 않는 권위의식 그 뒤로---
긍정적인 면--;민주화에 대한 영향력 행사. 각종 봉사활동 등 어떠한 압력단체나 중간 집단 못지않게 활발
부정적인 모습--;증가일로에 있을때 대형화된 교회에서 나타나는 대기업화 현상은 심각
소수의 기득권층에게 협력 체제속에 안주, 보수적 성향

초기교회-고통과 순교속에서 성장, 오늘의 위치에 도달
박해 받으며 끈질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던, 자유와 사랑을 부르짖고 공동체의 상부상조를 외치던 가난한 마음의 교회가, 헌신과 순교로 성장해온 교회가 이제는 끼리끼리의 모임이고 상부상조는 뒷전, 교우간에는 신뢰못하는 세속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뒤로 밀려나는 것 사회만이 아닌 우리들의 교회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다행히 우리 본당은 ------작은 모습이라도 불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현대인들은 급격하게 변하는 사회와 문명의 발달로 가치질서와 삶의 지표를 잃고 허둥대고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실정이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자세와 방향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단순히 주일에 성당에 나가는 것만으로 신앙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 답게 사회속에서 세속 삶속에서 또한 평소의 일한 노동의 결실에도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풍겨야 된다.

먼저 그리스도인을 정의하자면 ‘그리스도를 따르는자(들)’이라 표현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일 것이다. 역사안에 실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면면을 살펴보면 기적적으로 태어나서 사생활을 영위했으며 공적인 활약뒤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셨고 언젠가는 재림할 것이다. (태어나시기전 저승에 선재하셨고) 그런데 선재나 재림은 우리의 체험영역 바깥부분이므로 별로 관심이 없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는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방향 지워짐이 달라진다고 본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처신을 본받아 살아야 된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본받는 것은 그럼 모방인가? 아니면 추종인가? 참 어려운 일이다.
저 역시 성서 읽고 이렇게 강의도하지만 말하기는 쉬워도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는 어렵고 더구나 처신대로 따르기가 어려운점이 너무 많다.
성서의 말씀(산상수훈)을 보면 참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나 자신이 그렇게 살기 어렵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권유하기란 더 어렵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을~~~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벗어주어라~~~
오리를 가라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솔직히 이렇게 할 사람~~~

또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심지어 머리카락을 두고도 맹세말며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라고 명하셨다. 이 말씀을 곧이 곧대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그렇게 잡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바보 천치 일때 그 앞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웃 사랑을 생각하면 그를 바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진실(바보라는 것)과 사랑의 가치가 상충할 진실의 가치보다는 사랑의 가치가 앞서니까 그걸 따라야 하겠다. 자 그러면 성서에 쓰여진 그대로 이를 악물고 사는 것이 장땡이냐 아니면 궁여지책으로 예수님 말씀을 헤아려서 알아 들어야 하느냐는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우리가 성서 말씀대로는 도저히 실천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궁여지책으로 가능한 길을 찾아보는 사조 말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으로 봐서 이렇게 알아 들어야 하고 저런 말씀은 저렇게 이해한다는 식, 즉 방향을 잡는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자칫 상대화 시키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대로 다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못지 않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내 편리한대로 해석하여 자기 변명을 삼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올바로 아는 것, 믿는 것, 사는 것이 다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올바로 알아야 올바로 믿을 수 있고 올바로 믿어야 올바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는 것이 곧 믿는 것으로 전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보다는 신앙이 먼저다. 어떨때는 신학이라는 자체가 신앙을 뿌리채 흔들 수도 있다. -나의 경험담
비평이전의 신앙, 비평이후의 신앙의 차이는 크지 않다. 백치와 천재는 종이 한장 차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지향은 누룩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 있다. 누룩은 스스로 없어져 빵을 부풀게 한다. 누룩이 누룩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이기적인 신앙생활
속옷은커녕 겉옷까지 주지 않으려 움켜쥐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생각속에 머물러 하느님 나라가 어떻고 비 그리스도인에게 해봤자 그들에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게 뻔한 뻔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외인을 위해서 철저히 희생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진정한 누룩과 밀알의 역할을 다하려면 자신이 죽어 썩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선교는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고 쉬워질 것이다. 주일 하루만 성당에 나와서 거룩한체하고 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깡그리 그리스도인이란 신분을 잊고 지낸다면 진정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히 반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자꾸 우리 교회로 오라고만 할 것이아니라 직접 가서 보여주는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널리 알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살아나갈 각오를 새로이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믿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한스 킴 신부님 저 (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란 책 추천”

이 사회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은

가톨릭 사회교리-크게 두개의 부분으로 구성

①기본원리 -존엄성의 원리, 정의 원리, 보조성 원리
②기본원리를 실현하고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행동 주역들의 지침
행동주역--; 공권력자와 국민, 기업인과 노동자 혹은 가난한 이들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하는교회

그 외에도 사회교리는 언론인과 지식인, 부모의 역할과 행동지침도 다루고 있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가장 기본적 원리 - 인간 존엄성의 원리이다. 다른 원리와 행동지침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 이 존엄성의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