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정하상 바울로의 전기 2002/11/22(금)
성인 정하상(바울로)은 신유년(1801) 4월 8일에 순교(殉敎)한 정약종(아우구스티누스)과 기해년(1839) 11월23일 순교(殉敎)한 성녀 유 체실리아의 아들이며, 같은해 순교(殉敎)한 정 엘리사뱃과
남매간이자, 한극 사상사 안에서 유명한 정약용, 약진의 조카이다. 그는 유서깊은 양반가의 후예였다.
신유박해로 뿌리째 흔들려버린 초기 교회의 재건을 위해 온갖 정성과 힘을 기우렸던 그는 순교를 각오한 마지막 함변을 토하는, 유서와도 같은 "상재상서(上宰相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다가오는, 뛰어난 교리서라고 하고싶다. 또한 이 저작의 유창하고 아름다운 문장 구조 때문에 극 반대파까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여 이 기경(李基慶)은 원문 그대로를 "벽위편(闢衛編)" 정중히 기록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임은 증거 하였던 성인의 전기를 아래와 같이 요약 하여 본다.
성인 정 바울로는 정조 9년(1795년)에 경기도 양근군 마현(馬峴_마제)촌에서 탄생했다.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자 가롤로의 친아우이다.
신유 박해에 그부친과 형이 천주를 위하여 생명을 버렸고, 신자 아닌 그의 친척들도 연좌되어 화를 당한이가 많았다 . 그때 바울로의 나이가
겨우 일곱살이었는데, 과부가된 그의 모친과 함께 서부(西部)에 갇혔으나 집안살림을 몰수 하여 관사로 들인 후 석방 하였다.
갈곳이 없어 그의 숙부 정약용의 집에 곁방살이를 하였다. 모친으로 부터 교리와 기도문, 교훈등을 배웠으나 외교인들로 둘러쌓인 지방이라
천주교의 교리를 지키기가 어려 웠고 교우를 만나지 못해 교리를 똑똑히 배울 길이 없었다.
그의 나이 20세되어 그의 모친과 동정 누이와 이별을 하고 몇몇 교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가난한 두 교우의 집에 몸을 붙여 신덕을 쌓았다. 이러는 사이에 그는 양근에 살던 학자 교인 조동섬(유스티노)이 귀양살이 하고 있던 함경도 무산으로 그를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그의 권유로 교회재건을 위하여 북경에 들어갈 결심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교우들이 모아준 여비로22세 되던 1816년 10월 24일에 서울을 떠나는 동지사 이조원 일행의 역관의 하인이 되어그해 연말 북경에 이르러 북경교구 부주교 리베리오(Reberio)신부를
찾아가 신부 파견을 간청 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청나라의 교회박해로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교리서와 성물만을 얻어가지고 이듬해 3월 귀국하였다.
그의 이 용감한 북경 방문으로, 다시 북경교회 와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이후 10여년 동안 9회에 걸쳐 몸소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를 맞아 들이는 일을 추진 하였다. 북경에 갈때마다 성당에 들러
성사를 받고 주교 앞에서 간청 하기를,
'저의 나라를 불쌍히 돌아보사 목자 한분을 명하여 보내 주십사' 하였다.
거의 해마다 동지사 틈에 끼이어 부경을 오가며 신부를 맞이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특히 1823년 에 유명한 한어역관 유진길과 사귀게되어 그이듬해 그와 함께 북경에 가서 북경 부주교 리베리오에게 아오스딩이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또한 신부 파견을 간청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25년 이여진(요안)등 몇명의 교인 이름으로 로마 교황 에게 편지를 올려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림과 아울러 신부 파견을 다시 간청하였다
이에 감동한 북경 주교는 2명의 중국인 신부가 조선에 진출 할 뜻이있슴을 알고 조선 교인들이1826년에 북경까지 와서 그들을 모셔 갈것을 바랐으나 정하상은 봉황성의 변문까지만 마중을 나갔기에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1827년 다시 북경으로 가서 신부 파견을 간청하니 주교 프레스는 오히려 미신자(未信者)의 집에서 곁방살이 하는 모친과 누이를 찾어 모시고
그들의 구령에 힘쓰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는 돌아온 그 날로 모친과 누이를 모시고 서울로 들어 왔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고향 마재로 돌아가 5~6년 동안 그 친족들에게 전교 하였다.
그는 비록 숨어사는 몸이었으나 원래 지식이 뛰어났고 재주가 훌륭하여 하는일마다 빈틈이 없었다 그 때문에 모든 신자둘이 우러러 보는 인물이 되었다. 어떤때 봉제(封祭)때가 아니라도
사순절 (四旬節)을 지켰고 금요일마다 대제를 지켜 고신극기(苦身克己)하려고 애를썼다. 집안 용돈을 아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기를 즐겨 하였다.
그리고 교중의 모든 사무를 타당(사리에 맞게)하게 지휘하였다. 그후 순조33년(1833년)에 청나라 유방재 신부가 나온다는 명령을 받고 위험을 무릅쓰고 변문에 가서 맞아들이고,
그후 모든일을 도와드리느라 정신과 몸이 피로해 약해져가도 중대한 일을 굽히지 않았다. 세번이나 변문에 가서 주교(앵베르, 범 Imbert), 신부(모방, 나신부Maubant, 샤스땅 정 신부 Chastan)들을 모셔온 이래 그 앞을 떠나지 않고 복사(미사중에 신부를 도우는 일)하면서 라틴어 서적, 신학을 부지런히 배웠다.
1838년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고 도리에 밝아서 몇해안에 신품을 받게 될 것 같았으나 이듬해 모진 박해가 일어나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
기해년(헌종 5년1839년) 대 박해가 한참 심할 무렵 주교를 모시고 서울에서 한달여 피신하고있다가 풍파가 약간 수그러 지자 주교는 정하상 바울로의 제자 하나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고 바울로는
서울에 남아 교회의 사무를 담당 하면서 집안일을 겸하여 보살폈다. 그해 그는늙은 모친과 누이와 함게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다
관사(官使)가 성명과 사조(祖, 外祖,妻祖,妻外祖)를 묻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자신이 저술한 진정서를 종사자(서기)에게 바쳐 우의정 이재연에게 올렸다.
세쨋날 포장(주임급)이 심문 하기를
"너는 왜 조선 풍속을 따르지 않고 사교(邪敎)를 행하며 또 무식한 백성들에게 널리 선전하여 사회질서와 옳은 사람을 흐리게 하느냐?" 하였다. 이에 바울로는
"서양의 아름답고 좋은 물건은 사람이 다 취하여 쓰는데 왜 천주교만을 사교라라 하여 그 참되고 바르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취하지
않습니까? 천주교는 사람마다 아니 행할 수 없는 올바른 종교 입니다." 라고 답변 하엿다.
포장이 또 말하기를
"너는 천주교를 좋다고 하고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니 그 죄는 마땅히 사형에 해당한다." 고 말하였다.
진정서의 글 뜻을 자세히 묻더니 또,
"너의 말은 옳지만 감히 나라에서 금하는것을 무릅써 가면서 작당을 하여 종교를 시행한단 말이냐?"
하고 관청 뜰에 묶어놓고 주리를 틀어서 어깻죽지가 축늘어진 다음에 옥에 가두었다.
두번째는 여러가지로심문 하였다. 또 주리를 틀어서 다리뼈가 다나왔다.
세번째는 좌포청(경찰서에 해당)으로 옮겨다가 주교와 대질 시키고 나서 곤장으로 온몸을 찧고 단단한 동아줄로 양다리를 단단히 감아 잡아당기고 세모 장(杖-몽둥이)으로 패니 양 허벅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뼈가 나왓다. 붉은피가 솟아 땅바닥에 흐르는 지경이었으나 그의 얼굴빛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리고 신부의 행방과 신자가 모여 있는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포교들이 마구때리고 꾸짖고 욕하는것이 비할데가 없었다.
그때에 세분의 신부(범주교, 나, 정 신부)와 세사람(정, 유진길, 조신철)이 의금부에 함께 잡혀 있었다.
8월 15일 신시(申時-오후네시 전후)에 유진길 아오스딩과 함께참수형으로 순교 하였으니 그때 나이가 마흔네살 때는 1839년 이었다
정하상 바울로가 형장으로 나갈적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으며 이 세상 사물에 더 이상 구애되지 않은 것 같았다,"고 증인들은 말하였다.
<후기>
모든 순교 성인들이 고통 속에서도 의연히 하느님을 위해 목숨 버리셨지만, 유독 이분이 내게 다가온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 해본다. 이시대를 사는 난 그분들의 피 덕분에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열정적이고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짊어질 용기와 믿음은 없을 것 같다, 지금의 현실에는 목숨을 내어놀 만큼의 신앙생활에 위혐을 주는 것은 그 아무것도 없다.
그럼 현실에서 순교란 무엇인지를 생각 해 본다.
어느 때 보다 유혹이 많은 세상을 살면서 난 달콤한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을가?
부귀영화와 헛된 욕망의 유혹을 물리칠수 있을가? 이러한 자신의 안위만 바라는것을 버리는게 현대의 순교는아닐까 생각 해본다. 그러나 자신있게 예수님께서 바라는삶을 살아낼 자신은 없다.
그러면서도 신자인 내 자신이 순교 하신 조상들을 논한다는 자체가 부끄럽다. 정하상 바오로 순교 성인께서는 어릴적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였지만, 주옥같은 글을 쓰셨고 그분을 국법을 어긴 중죄인으로
사형을 시키면서도 그분의 아름다운 글을 역사의 한페이지에 남겼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