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분열의 원인 - 마틴루터의 생애|Master||2003/1/18(토)
작성자
dolphin
작성일
2025-10-06 13:27
조회
130
16세기 종교분열의 원인 이었던 마틴루터의 생애와 그의 사상, 가톨릭의 입장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자 합니다.개개인 모두의 입장이 다르고 종교에따라 생각 하시는바가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편견없이 냉철하게 판단하셔서 수용하실 것은 수용하시고, 버릴 것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글은 생활성서의 일부분과, 박도식 신부님의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저의 좁은 소견을 편집한 것입니다. 혹 잘못된 부분이 있다교 생각되시면 관리자에게 메일 주시면
시정토록 하겠습니다.
마틴 루터의 생애 요약
종교혁명으로 유명한 마틴 루터의 사상에 대해서는 그 이름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톨릭 입장에서 볼 때 그가 그리스도교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측면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종교 혁명이후 가톨릭 교계와 루터 교계는 줄곧 서로의 견해를 배척해 왔다.
그러나 1997년 말 발표된 양측 신학자들의 칭의론, 성의론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문이 양 교회측의 동의를 얻게 되면서 점차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여기서 마틴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고자 한다.
당시 종교적 상황과 오늘날의 개신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출생에서 교수가 되기까지;1483년 11.10 작센 지방 소읍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출생 마크데브르와 아이제나흐에서 초, 중등과정을 마침
1501-1505년 에르프르트(Erfurt)대학 인문학부에서 수학, 문학사, 문학석사 학위 취득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입회
1505년 9월 수도서원
1507년 4월 에르푸르트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서품
1508년 비텐베르크(Witenberg)대학 입학, 신학연구
1509년3월성서학사 학위 취득
1510년말경 루터는 독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독일 관구 총대리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수도회개혁안을 인준 받고자 로마 교황청을 방문 개혁안을
인준 받지 못했을뿐더러 교황청의 세속화에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1513년 10월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 취득. 신학과 대학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성서학 교수로 취임.
1517년 이런 소문을 들은 루터는 95개 명조를 만들어 동료에게 보냈다.
95개조 명제 ; 보속 경감을 면죄로 곡해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례로 도미니꼬 수도회 소속 텟첼(Johann Tetzel)은 위테르 보고에서
설교하면서 "헌금함에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연옥에서 영혼이 뛰쳐나온다."고 외쳤다.
1517년 말에서 1518년 초 사이에 이 95개로 명제가 출판업자 손에 넘어가서 라이프티히, 뉘른베르크, 바젤에서 인쇄 유포됨으로써 큰 사건이 되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베텐베르크의 성채<BR> 성당 전문에 95개의 명조를 붙였다는 것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무근
1518년 텟첼-- 루터의 95개조 명제에 반대하는 반명제들을 지지하는 설교.
그해 3월 반명제 사본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들 사본들을 불태움
교황 레오 10세(1513년-1521년 재위)--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장에게 루터 문제 해결 지시
1518년 4월 아우구스티노회 독일 관구장 슈타우피츠는 하이델베르크 총회에서 루터에게 침묵을 명 그해 5월 루터-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순명 다짐
1518년: 아우크스브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교황 특사로 카예티누스 추기경은 교황으로부터 루터를 심문하라는 특명을 받음
1518. 10.12-14 아우크스브르크에서 심문--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 압송 소문으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탈출
1520. 6. 15 레오 10세 교황 교서 반포--루터 교설 가운데서 41대조를 단죄함과 아울러 60일안에 오설을 취소 요구
1520년 여름 교서에 대한 도전적 논문 3편을 씀
독일 국가의 그리스인 귀족에게 고함-독일 민족 지도층이 교회개혁에 앞장설 것을 촉구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 관한 서곡-7성사를 3성사(세례, 성체, 고해)로 축소,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변체설을 부정,
교황의 권위대신 성경의 절대성과 양심의권리 주장 그리스도인의 자유론
1520. 12.10 비텐베르크 엘스터 성문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교서를 불태움으로 가톨릭 교회와의 절연 의사를 표시
1521. 1. 3 레오 10세 교황--루터 파문 교서(Deoet Romanum Pontifioem) 반포
당시 교황청은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같다. 독일 변방의 민둥머리 수도자의 객기로 여긴 듯 하다.
1521. 1. 27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로마 제국회의에 출두 명령
4. 16 루터 도착
4. 17 카를 5세 황제(1500-1558년)--주장 철회 요구. 생각할 말미를 청하고
4. 19 자신의 교설이 성서에 어긋난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취소될 수 없다고 단언
4. 26 보름스 탈출
1523. 3 까지 11개월간 바르트부르크 성채에 기사로 변장 숨어 있었다.-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1464-1525)루터가 납치된 것처럼 꾸밈
152? 5. 8 루터의 법익 박탈(카를 5세)하고 그의 저서 판매 금지 칙령에 서명 5. 25 위 칙령 공포
1522년 9월 바르트부르크 성채에서 그리스 신약성서 출판, 독일어로 번역-- 가장 빼어난 독일어 신약성서 가운데 하나.
1534년 구약성서도 번역 출판
1521,10 비텐베르크 성채성당 대부제 카를 슈타트(1480-1541) 대부제직을 포기한 다음양형 영성체 예식을 도입, 성화상 공경을 배격
1522. 3월 1522년초 츠비카우 광신자들-세상종말 임박 주장. 이들의 급진적 개혁을 잠재우고 중도적 개혁을 추진
1524년 여름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방의 농민들 봉기
루터-- 평화를 촉구함이란 글에 제후들에게 농민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농민들에게 인내와 평화를 호소
1525년 제 세례파 급진주의 지도자 토마스 뮌처(1493-1525)의 주도로 중부 튀링겐 지방의 농민들 약탈과 살인
-- 루터-"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농민 패거리를 반대함"이라는 독설적인 글을 써서 무력으로 가차없이 진압하라고 제후들에게 촉구
1525. 5.15 농민군 붕괴-농민 피의 숙청 당하다
1525. 6. 13저녁 42세의 루터 토르가우 읍내 시토티 수녀원에서 탈출.카타리나. 폰보라와 결혼 그후 3남 3녀
1526년 제 2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 보름스 칙령 시행--루터파 종교 혁명을 중지시키기로 의결--이에 루터파 제후들 거세게 항의(Protest)했다.
이때부터 루터파는프로테스탄트 라고 불리게 되었다.
1530년 카를 5세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 소집,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화해 종용-- 루터 법익 박탈로 제국회의 참석 할 수 없었다.
루터-제국 회의 참석한 멜란 히튼원격 조정. 멜란 히튼-'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출 가톨릭 대표--이에 대한 반론--멜란 히튼 다시 "신앙
고백 변론"을 제출했으나 황제가 접수 하지 않았다.
1531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가톨릭과의 일전에 대비 에르푸르트의 남서쪽 슈발칼텐에서비밀 군사동맹
1532년 카를 5세 터키 침공직면 뉘른베르크 종교 강화회의에서 개신교도들과 휴전 동의
헤센 백작 필립 사건과 루터의 종생 백작은 종교 혁명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본 부인이 살아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동거, 결혼을 원했다.
이는 예수의 반 이혼율에도 어긋나고 교회의 전통에서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필립의 도움을 계속 받기 위해
1539년 3월 백작의 중혼을 허용. 세인(世人)모르도록 절대 비밀 요청과 함께 원칙을 버리고 상황 논리에 얽매인 한심한 사례이다.
"유다인들과 그들의 허위를 논박함"이라는 글에서 루터는 예수와 마리아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유다인들의 회당과 집과 책들을 없애고
유다인들을 독일에서 추방할 것을 촉구 19-20세기 반 유다주의자들은 루터의 글을 금과 옥조처럼 이용, 나치정권이 유럽의 유다인 6백만 명을
학살한 사건은 반 유다주의의 극치이다.
"마귀가 세운 로마 교황권을 논박함"이란 글을 썼다. 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자 가장 신랄한 것이었다.
1545. 11. 17 창세기 강의를 마지막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은퇴
1546. 2. 18 새벽 두 아들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귀천
2. 22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로 옮겨져 설교단 아래 묻혔다.
다음 글에는 루터의 사상에 대하여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끝--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입회
1505년 9월 수도서원
1507년 4월 에르푸르트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서품
1508년 비텐베르크(Witenberg)대학 입학, 신학연구
1509년3월성서학사 학위 취득
1510년말경 루터는 독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독일 관구 총대리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수도회개혁안을 인준 받고자 로마 교황청을 방문 개혁안을
인준 받지 못했을뿐더러 교황청의 세속화에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1513년 10월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 취득. 신학과 대학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성서학 교수로 취임.
1517년 이런 소문을 들은 루터는 95개 명조를 만들어 동료에게 보냈다.
95개조 명제 ; 보속 경감을 면죄로 곡해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례로 도미니꼬 수도회 소속 텟첼(Johann Tetzel)은 위테르 보고에서
설교하면서 "헌금함에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 연옥에서 영혼이 뛰쳐나온다."고 외쳤다.
1517년 말에서 1518년 초 사이에 이 95개로 명제가 출판업자 손에 넘어가서 라이프티히, 뉘른베르크, 바젤에서 인쇄 유포됨으로써 큰 사건이 되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베텐베르크의 성채<BR> 성당 전문에 95개의 명조를 붙였다는 것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무근
1518년 텟첼-- 루터의 95개조 명제에 반대하는 반명제들을 지지하는 설교.
그해 3월 반명제 사본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들 사본들을 불태움
교황 레오 10세(1513년-1521년 재위)--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장에게 루터 문제 해결 지시
1518년 4월 아우구스티노회 독일 관구장 슈타우피츠는 하이델베르크 총회에서 루터에게 침묵을 명 그해 5월 루터-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순명 다짐
1518년: 아우크스브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교황 특사로 카예티누스 추기경은 교황으로부터 루터를 심문하라는 특명을 받음
1518. 10.12-14 아우크스브르크에서 심문--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 압송 소문으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탈출
1520. 6. 15 레오 10세 교황 교서 반포--루터 교설 가운데서 41대조를 단죄함과 아울러 60일안에 오설을 취소 요구
1520년 여름 교서에 대한 도전적 논문 3편을 씀
독일 국가의 그리스인 귀족에게 고함-독일 민족 지도층이 교회개혁에 앞장설 것을 촉구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 관한 서곡-7성사를 3성사(세례, 성체, 고해)로 축소,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변체설을 부정,
교황의 권위대신 성경의 절대성과 양심의권리 주장 그리스도인의 자유론
1520. 12.10 비텐베르크 엘스터 성문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교서를 불태움으로 가톨릭 교회와의 절연 의사를 표시
1521. 1. 3 레오 10세 교황--루터 파문 교서(Deoet Romanum Pontifioem) 반포
당시 교황청은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같다. 독일 변방의 민둥머리 수도자의 객기로 여긴 듯 하다.
1521. 1. 27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로마 제국회의에 출두 명령
4. 16 루터 도착
4. 17 카를 5세 황제(1500-1558년)--주장 철회 요구. 생각할 말미를 청하고
4. 19 자신의 교설이 성서에 어긋난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취소될 수 없다고 단언
4. 26 보름스 탈출
1523. 3 까지 11개월간 바르트부르크 성채에 기사로 변장 숨어 있었다.-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1464-1525)루터가 납치된 것처럼 꾸밈
152? 5. 8 루터의 법익 박탈(카를 5세)하고 그의 저서 판매 금지 칙령에 서명 5. 25 위 칙령 공포
1522년 9월 바르트부르크 성채에서 그리스 신약성서 출판, 독일어로 번역-- 가장 빼어난 독일어 신약성서 가운데 하나.
1534년 구약성서도 번역 출판
1521,10 비텐베르크 성채성당 대부제 카를 슈타트(1480-1541) 대부제직을 포기한 다음양형 영성체 예식을 도입, 성화상 공경을 배격
1522. 3월 1522년초 츠비카우 광신자들-세상종말 임박 주장. 이들의 급진적 개혁을 잠재우고 중도적 개혁을 추진
1524년 여름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방의 농민들 봉기
루터-- 평화를 촉구함이란 글에 제후들에게 농민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농민들에게 인내와 평화를 호소
1525년 제 세례파 급진주의 지도자 토마스 뮌처(1493-1525)의 주도로 중부 튀링겐 지방의 농민들 약탈과 살인
-- 루터-"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농민 패거리를 반대함"이라는 독설적인 글을 써서 무력으로 가차없이 진압하라고 제후들에게 촉구
1525. 5.15 농민군 붕괴-농민 피의 숙청 당하다
1525. 6. 13저녁 42세의 루터 토르가우 읍내 시토티 수녀원에서 탈출.카타리나. 폰보라와 결혼 그후 3남 3녀
1526년 제 2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 보름스 칙령 시행--루터파 종교 혁명을 중지시키기로 의결--이에 루터파 제후들 거세게 항의(Protest)했다.
이때부터 루터파는프로테스탄트 라고 불리게 되었다.
1530년 카를 5세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 소집,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화해 종용-- 루터 법익 박탈로 제국회의 참석 할 수 없었다.
루터-제국 회의 참석한 멜란 히튼원격 조정. 멜란 히튼-'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출 가톨릭 대표--이에 대한 반론--멜란 히튼 다시 "신앙
고백 변론"을 제출했으나 황제가 접수 하지 않았다.
1531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가톨릭과의 일전에 대비 에르푸르트의 남서쪽 슈발칼텐에서비밀 군사동맹
1532년 카를 5세 터키 침공직면 뉘른베르크 종교 강화회의에서 개신교도들과 휴전 동의
헤센 백작 필립 사건과 루터의 종생 백작은 종교 혁명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본 부인이 살아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동거, 결혼을 원했다.
이는 예수의 반 이혼율에도 어긋나고 교회의 전통에서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필립의 도움을 계속 받기 위해
1539년 3월 백작의 중혼을 허용. 세인(世人)모르도록 절대 비밀 요청과 함께 원칙을 버리고 상황 논리에 얽매인 한심한 사례이다.
"유다인들과 그들의 허위를 논박함"이라는 글에서 루터는 예수와 마리아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유다인들의 회당과 집과 책들을 없애고
유다인들을 독일에서 추방할 것을 촉구 19-20세기 반 유다주의자들은 루터의 글을 금과 옥조처럼 이용, 나치정권이 유럽의 유다인 6백만 명을
학살한 사건은 반 유다주의의 극치이다.
"마귀가 세운 로마 교황권을 논박함"이란 글을 썼다. 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자 가장 신랄한 것이었다.
1545. 11. 17 창세기 강의를 마지막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은퇴
1546. 2. 18 새벽 두 아들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귀천
2. 22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로 옮겨져 설교단 아래 묻혔다.
다음 글에는 루터의 사상에 대하여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