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의 사상과 비평 |Master| 2003/4/21(월)

작성자
dolphin
작성일
2025-10-06 13:22
조회
150

마틴 루터의 사상에 대한 비평

번민과 깨달음
타고난 열정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 그럴수록 죄의식에 사로 잡혔다.
그런 가운데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1515-1516년 사이 그의 사상을 정립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문제
개신교 측에선 종교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을 당시 가톨릭 부패를 들고 나온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근본적 문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당시의 가톨릭의 일부 성직자의 타락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의 부분적 타락이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의 타락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루터의 교회 분열 당시의 상황을 잠시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면죄부에 대해서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베드로 대성당 신축기금을 모금하고자 이른바 대사부(indulgentia)를 발행했다.
이는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가 아니고 고해성사때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경감해 주는 증서, 그리고 고백사제를 타지역에서라도 선택하여 고백성사를 허락하는 증서였다.
그런데 새 우리말 큰 사전에 면죄부(indulgence)를 중세기 로마 천주교회에서 금전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멸한다는 뜻으로 교황이 발행하던 증서라고 풀이하고 있다.
종교 역사적 사건을 국어학자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영문으로 인둘젠스라고 소개하면서도 면죄부라고 번역했는지 의역도 정도가 지나치다. 이런 현상이 어제의 일만도 아니고
현재에도 종 종 있음은 학자라 자처하는 자들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언젠가 공영방송의 성탄 특집 프로그램에 성지를 소개하면서 가톨릭의 프란치스꼬파의 소유라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소리를 그것도 방송에서
해대는 정도이니 무식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말고는 달리 할말이 없다.

언제부터 가톨릭내에서 파가 갈려 있었는지?..... 파(派)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채. 가톨릭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자들이 종교에
관련된 방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너무 주관적인 이야기만을 늘어 놓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먼저 인둘젠스(indulgence)라는 단어의 근원은 라틴어 indulgentia(관대, 은사, 후하게 베풀어줌)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 단어는 동시에 indulgere(관대하게 처리하다. 용서해주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 어원을 둔 인둘젠스라는 뜻은 '관대' '용서' '호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정확히 번역하려면 '대사부' '대사령' 이 되어야만 옳았을 것이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면죄부라는 그 오욕적인 말 때문에 그 말만 나오면 고개를 숙이는 분이 많을 것이다.
면죄부 사건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대사문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대사라 함은 '고백성사'로 죄는 사함을 받았지만
그 죄에 따라오는 잠벌의 일부, 혹은 그 전부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면죄해주는 은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죄와 벌은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는 사해졌지만 그 벌은 그대로 남아있다. (잠벌)
비유컨대 급한 병으로 수술을 받게 되면 환자는 그 수술로 생명을 건졌지만 수술의 통증이나 상처는 남아 있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오는 통증 그 벌은 보속을 통해서 없어지는데 교회가 부여하는 대사를 통해서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를 비유하자면 국민적 대 경축일날 대통령이 특사를 베풀어 투옥된 죄수들에게 감형을 주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교권으로 현재 매 25년마다 소위 성년(聖年)을 선포하고 특별히 대사를 베푸는 제도도 있다.

앞으로 돌아가서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 성전 건립을 위해 세계 교회를 통해서 모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레오 10세 교황은 대사를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조건에다 성전 건립을 위한 응분의 헌금 조항을 하나 더 첨부한 것이 소위 면죄부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
이 헌금은 개인의 영락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수제자 베드로의 성소를 마련하고자 한 것인데 하등의 잘못이 있을 수 없다.
그곳이 성 베드로가 순교한 성지인 이곳에 교회를 짓기 위해 모금한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
그런데 이 대사령이 독일에 와서 전달 방법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독일 교회의 대사담당 추기경 알베르토(Albert)대주교는 대사령을 널리 선전하여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 대사 교리와 그 선전 방법에 관해서 장문의 교서를 발표한 바있다.

이 교서에서 대사받는 조건을 소개하면
1. 과거에 범한 죄를 참회 한 후 고백성사를 받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일곱 성당을 순례, 순례때 마다 그리스도의 오상(못 박힌 양손, 양발, 옆구리)을 묵상하는 뜻으로 주의기도, 성모송을 다섯 번씩 외우든지 또는 시편 50편을 외워야 한다.
3. 성베드로 대 성전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3항에 대해서
헌금은 부자나 빈자나 다같이 갈 수 있도록 공개된, 즉 돈 없는 빈자들은 헌금 대신 기도나 단식으로 대사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밝혀 놓았다.

그리고 교서에는 1, 2항을 실천한다는 조건하에서 먼저 헌금하는 이에게 헌금 수령증서를 주었다.
이 증서를 가진 자는 고백신부의 선택에 있어서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 헌금 수령증서가 와전되어 소위 면죄부라는 이름을 붙여 허무맹랑하게 돈을 주면 죄가 사해진다는 비약적 언사로 변화된 것이다.

사죄권--관할권의 문제--교회법상 사죄권이 제한되어있다. 신부는 지위여하, 또는 죄의 경중, 또는 관할권의 문제 등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 내에서만 사죄권을 행사할 수 있다.
헌금 증서 가진사람은 교회 법적인 제한 없이 어느 신부에게나 또 신부는 헌금증서 소유자에게 제한 없이 교회로부터 받은 사죄권을 행사할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솔직히 교회 일부에서는 이 헌금 증서를 내세워 지나친 모금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도를 넘어서는 남용도 있었다.
이것이 소위 종교개혁의 원인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분적 잘못들을 내세워 일반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루터의 사상과 개신교

앞서 종교개혁의 상황과 루터의 생애에 관한 고찰을 해 보았다.
여기서는 그의 신학적 사상과 그를 추종하는 루터파 내지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장단점을 비교, 교회가 지향해야 할 내일을 개진하여 보도록 한다.

앞서 다루었던 루터의 생애에 이어 그의 처신과 교설에 대한 평을 하여 보자.
루터의 동료였던 멜란히튼, 소의위노 주네브의 장 칼뱅은 냉철해서 각기 나름대로 신학을 정립했으나 이들과는 달리 루터는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
자신의 신학을 조직적으로 정리하지 않았으나 그의 영향력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성의론, 칭의론

루터는 바오로의 로마서의 인간 구원론에 심취했다.
로마서의 명제 ;하느님의 의로움은 복음에서-믿고 믿음으로써-계시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것이다.;(로마 1,17)를 인간 구원의 도리로 생각했다.
인간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바오로의 구원론을 가톨릭에선 의화론 성의론(義化論 成義論)이라하고
개신교에서는 칭의론(稱義論) 의인론(義認論) 인의론(認義論)이라 한다.
루터교계에서는 하느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게 인정한다는 식으로 바오로의 구원론을 풀이(justitia imputata),
이와는 다르게 가톨릭에선 하느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게 만든다는 식으로 풀이 했다. 생각해 보면 다분히 현학적 탁상공론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루터의 견해에 교황청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 의화에 관한 가르침을 전통과 다른 공의회들과 선배교부들에 충성되이 결합되어서 교시를 결정한다고 선언하였다.
앞서도 이야기 되었지만 루터는 타고난 열정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런 가운데 로마서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하느님의 의로움은 복음에서 계시된다.;(로마 1,7-㉠)는 로마서의 명제를 대하고서는 루터의 번민은 증폭되었다.
루터는하느님의 의로움을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이해하여 자신같은 죄인은 도저히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감당할수 없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1545년에 출판한 전집 서문에서 루터는 내가 수사로서 제 아무리 나무랄데 없이 살아간다 해도 나는 하느님 앞에 번민하는 양심을 지닌 죄인이라고 느꼈고
스스로 만족할 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할수 없었다.

나는 이 정의로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중략……그렇지만 나는 바오로가 진짜 의도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열렬한 마음으로 바오로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중략……'하느님의 의로움은 복음에서-믿고 믿음으로써-계시된다.;(로마 1,7-㉠)는 글귀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7,2)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은혜로운
하느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점을 깨닫자 나는 다시 태어나 천국으로 통하는 활짝 열린문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라고 그의 그때의 느낌을 적고 있다.
루터가 이런 깨달음을 얻은 곳이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실인 까닭에 이를 '탑실 체험'이라고 한다.(1515-1518사이)


루터는 가톨릭의 교도권을 배척, 오직 성서만을 신앙의 진리로 삼았다.
성서 text가 고정되어 있는 만큼 신앙의 진리가 분명해 질 것 같지만 실제는 그들의(개신교) 성서내용의 이해가 서로 다르기 일쑤이니 탈이다.
성서text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논쟁이 벌어지고 서로 갈라서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똑같은 성경을 사용하면서도 끊임없이 분열하는 것은 그들의 숙명이라 할수 있다.

루터가 위대한 성서학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역시 역사 속의 이름일수 밖에 없다.
현대 성서학의 견지에서 그를 나무랄수는 없지만 현대적 성서학의 두가지 방법론, 곧 역사비평과 해석학에 무지할수 밖에 없었다.
특히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에 대해 해석학적 성찰을 하지 못했다.

그가 집착한 구원론도 죄를 용서받는 사죄중심의 구원론이었다.
그러나 죄와는 상관없이 유한성을 타고난 인간자체가 구원을 갈망하는 실존이 아니겠는가.

※해석학
주석 또는 해석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서 해석에 관계된 모든 것이 해석학과 결부되어 있으며
특히 성서 저자가 의도하던 바에 대한 탐구(성서 의미에대한 탐구)는 이 학문의 소관이다.


성서의 의미
①자구적 의미: 저자가 표현한 그대로 text어휘에서 드러나는 의미, 자료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성서 언어를 아는 일이 중요(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
역사에 관한 지식, 문학형태와 장르를 아는 지식이 요긴하다.

②표상적 의미 : 영적 의미. 어휘에 대해서 보다 심원하게 통찰하는 의미. 성서 본문이나 표현을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인의 삶과 결부시켜 알아듣는 의미

예:만나-문자상으로 출애급, 민수기에 나오는 사물을 가르키는 자구적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와 결부시킴으로써 표상적 의미를 띄게 된다.
(요한 6, 49-50 -나는 생명의 빵이다.
창세기 3장15절-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은 고유한 자구적 의미가 있지만 그리스도론과 마리아론에 입각하여 해석하면 표상적 의미가 생긴다.
더욱 충만한 의미로

③적용적 의미 : 중세 -- 역사적, 혹은 자구적 유추적론 혹은 그리스도론적, 예표적 혹은 윤리적 관상적 혹은 종말론적 의미의 네가지 형태.분자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유추가, 윤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관상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이 네가지 원리(서기 435년) 카시아노
예루살렘--자구적 의미--히브리의 도성
유추적 의미--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킨다.
관상론적 의미--천상도읍, 혹은 장차올 도읍
원리론적 의미로는-- 인간의 영혼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 권위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비판해 왔고 상당히 위협해 오던 바를 그리스도교 전통의 풍속으로 다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였다.

*인간의 자연적 인식은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뚫고 들어갈 능력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면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을 아는' 존재가 못된다.

*인간은 죄의 왕국에서 살고 있으므로 구원에 이르는 선행을 이루어낼 능력이 없다.
의화(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선물(은혜 sola gratia)이며 그것은 오직 신앙으로(sola fide) 얻을 따름이다.
바오로의 본문을 옹호하는 뜻에서 야고보서 처럼 신앙과 더불어 행위를 강조하는 성서 text를 배척,
각별히 로마서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같은 서간이라는 평과 함께 경전에서 배제한 일까지 있다.
그리고 신앙의 규준은 오직 성서뿐(sola scriptura)이다.

주님의 말씀이 요청하는 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각자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교회와 그 교도권이 갖는 권위를 부정하며 성전의 가치도 부정한다.
이 모든 논리의 결과로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성서 정전 목록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정전목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소위 제2경전(마카①②, 토비트, 유딧, 지혜, 바룩, 집회, 에스텔, 다니엘서의 일부분)이 삭제 되었다.

이에 트리엔트 공의회(1546, 4, 8일자 교령)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규정된다.

*성서 경전목록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소장되어있는 제 2경전을 포함한다.
*계시의 두가지 구분된 형태가 유효. 즉, 성서와 성전의 두 형태
*교도권의 효력과 권위에 관한 교의: 성경의 역사에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고 사도들이 전해준 교리를 언제나 진실하고 온전하게 간직해 왔다.
*불가타본은 라틴교회의 공식적이고 규범적 text로 인정

중세 분열당시의 주장들이 지금은 더러는 왜곡되고 변질되기도 했으나 루터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톨릭을 이단시 하는 현실이다.
종교개혁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가톨릭의 부패로 본질을 토로하고 있다.
그 역사적 사건을 일일이 다 이야기 할수는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만을 짚고 넘어가보자.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일부 성직자의 부패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일부의 성직자들의 부분적 타락이었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의 타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회 일부, 몇몇 성직자의 타락을 교회 전체와 결부시킬수는 없다.
현실의 개신교의 타락된 목사들을 가지고 전체 개신교의 타락으로 치부하지 않는것처럼 위와 같은 주장은 개신교의 불미스런 일들로 인해 그들 교회가 개혁하여
다른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정통교리와는 전혀 무관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엉뚱한데 있다. 정확히 말해서 타락한 성직자를 상대로 개혁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통 교리를 자기 임의로 뜯어 고쳐놓고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고 심판받게 되므로 종교분열을 조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선 종교개혁이라 않고 종교 분열이라 한다.
쉬운 예로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일부 정치인의 부패를 내세워 민주주의 자체를 제거하고 공산주의 또는 다른 독재정치를 내세운다면 그것이 과연 가장 건설적인
개혁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앞서 이야기한 루터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의 기본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신학이론이다.
(신앙규범은 성서, 성서는 자유해석 등) 교회의 교도권을 무시, 전통적 사도들의 가르침을 버렸다.
성서의 자유해석은 어느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가르침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그로인해 많은 종파가 생길수 밖에 없다.
(개신교 종파 :세계적으로 500여개가 넘는다.) 이 많은 종파가 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의 주장이 달라 분열되었는데 어떻게 모두가 진리라 말할수 있겠는가?

신앙으로만 구원이라는 이론은 인간의 어떠한 선행도 무시하는 태도이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로마 3, 28) 이 말을 내세우며 야고보서 2,26의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라는 말이 마땅치 않다라고 해서
성경이 아니라고 까지 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주의 적인 신앙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그가 가톨릭의 신부로서 독신생활까지 하느님앞에 약속하고도 쉽게 내팽개치고 수녀와 결혼했던 이유도 이미 이런 이론에 근거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속속들이 부패되어 다시 재게될수 없고 어떠한 선행도 할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쩌면 자신이 선언한 하느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그것을
거룩하게 변명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가톨릭의 교권제도 의식, 전통이 처음의 교회에는 없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인간 구원은 어떤 제도나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가톨릭의 칠성사를 루터는 세례, 성체, 고백(이후는 세례만~성목요일 성찬식 1년에 한 번정도)만을 인정한다고 주장,
이러한 사고 방식은 여전하며 더욱 강화되고 가톨릭을 비판하는 것 가운데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자신들의 편견만을 내세우는데 진정 구원은 무엇이며, 구원을 전해주는 교회의 사명을 생각해보자.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세계의 500여 종파의 개신교가 모두 구원의 진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신앙은 어떤 과학적, 수학적 진리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신앙은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과학이나 수학적 진리가 신앙을 증명해 줄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이비 종교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이 당시 타락된 교회였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교회를 악용한 일부 성직자들의 잘못이지 어째서 구원의 교회를 한 인간이 자기 임의대로 그것을 개조할수 있나?
그리고 그 개조된 그릇된 종파(개신교)에서만 구원이 있다고 하니 적반하장이고 억지일수 밖에 없다. 이러한 편견과 개인주관적인 구원론은 용납될수 없다.
그렇다면 가톨릭에만 구원이 있는가?
이것 또한 간단히 대답할수 없다.
이것은 구원신학으로 다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공식적 예배에서 가톨릭을 비방하는 설교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사강론중에 남의 종교를 비방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어떤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도 태연하다.
그것은 이천년전부터 수많은 이단과 싸워온 반석위에(베드로)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계제도(교권)
루터가 가톨릭의 교계제도에 의한 교권을 마귀가 세웠다는 그의 저술에서는 교황과 주교들의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교회라 주장한다. 우선 교회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명을 대리해서 인류 구원의 기관으로 세우신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하신 그리스도의 사명은 세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진리로 즉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듣고 가르치는 그리스도, 그래서 이것을 받은 교회는 교도권이 주인공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진리를 교회는 그대로 가르칠 의무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20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 10,16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잘못 전달된다면 우리 구원문제는 잘못될수 있다. 가르치는 스승은 언제나 권위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가르치는 사명을 띠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 진리의 정확성을 보증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여기서 ;죽음의 힘;이란 진리를 거스르는 오류를 뜻한다. 세상의 어떤 이단도, 이설도 베드로의 교회를 없애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고 언약하신대로 그리스도의 정통 가르침을 세상
마칠 때까지 보존되기 위해서는 교도권의 권리를 동시에 부여받은 것이라 하겠다. 그리스도는 다시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셨다.(요한 14, 15-16.
요한 16, 13) 이와 같은 말씀은 영원히 함께 계실 성령,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이것은 교회의 교권이 절대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교리가 서로 다른 잡다한 종파속에서 어떻게 진리의 성령이 그리스도의 정통진리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나는 길이요; 이 말씀은 양들을 다스리는 목자로서의 사목권을 뜻한다. 교회는 신자를 진리와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목자로서의 사명을 가진다.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명령으로 주셨다.(요한 21, 15-18) 같은 물음을 세 번씩이나 다짐하시고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명령하셨다. 사목권이란 쉽게 이야기 해서 교회의 행정권이라 하겠다. 교회는 물론 신앙인의 모임인 동시에 하늘나라를 향한 인간 구원에 목적을 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룩된 것이지만 어떻든 인간들의 모임이다. 개신교 역시 청년회, 학생회등 회장과 회칙이 있다. 이와 같이 가톨릭은 행정권의
책임자이신 교황과, 주교, 신부,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필요한 교회법이 있어 교회는 다스려지고 있다.
또 성경에서는 교회의 사명을 (마태 18,17) 그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말씀하신다.
계속하여 당신이 세우신 교회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무엇이든지 ~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8,18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신자들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교회에서만 해결할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닌 핵심적 요소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전달해주는 유일한 인간 단체이다.
여기서 교회는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은총, 즉 영생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교회에 사제권 즉 신품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이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가톨릭의 성체성사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교회를 베드로에게 세우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는 열두 제자중 첫째 제자로 수위권을 받은 그리스도교의 첫 책임자이다. 오늘 이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교황이다.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교도권(왕직), 사목권, 사제권(사제직)을 행사하는 그리스도의 대리기관이다.
그래서 이천년전에 그리스도로 부터 직접 세워진 교회인 가톨릭은 교권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이단과 세속 풍조 속에서 정통적인 구원의
진리를 조금도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 이 시대의 우리에게까지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의 개신교도 따지고 보면 가톨릭 없이 어떻게 존재할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정통한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도
먼저 가톨릭은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자유해석의 문제
가톨릭은 신구약 73권 개신교는 66권이라는 정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다 알고 있을줄 안다. 어떻든 개신교의 66권의 성경은 말할 것 없이 가톨릭에서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
첫 주인인 가톨릭은 73권이고 떨어져 나간 개신교는 66권이다. 여기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성 베드로복음, 성 야고보복음 등 가짜 성경도 많았다. 처음부터 성경목록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저술한 사실도 의도도 없으셨다.
이러한 성경목록을 만드는데 교회의 역활이 대단히 컸음은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내려오는 책과 신약시대에 쓰여진 책들 중에서 어느것이 진정 하느님의 계시가 담긴 성서인지를 판명하여 두차례에 걸쳐 성서 목록을 만들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렵고 난해난 책을 읽고 그책의 문장들을 해석한다고 할 때 개인마다 나름대로 해석은 하겠지만 그 책의 저자가 말하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가?
제대로 해석하자면 아마도 권위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반드시 따라야할 것이다.
성서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그것을 올바로 가르치는 교회의 권위가 있어야만 신앙의 진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해석을 위해선 우선 권위 있는 교회의 가르침이 있어야 함을 강조 해 둔다.

가톨릭의 종교의식, 성서해석 모두가 성경과 성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루터의 신학에 의하면 성사는 성서에 근거하지도 않고 또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닌 믿음의 형식일뿐이며 신앙에 필요치 않는 것이라고 주장 하며, 성경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서 해석은 개인의 양심에 비추어 자유로이 해석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하는 그들은 어찌하여 주일마다 목사가 설교하며,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또한 신도들은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지 묻지않을 수 없다.
성경자유 해석의 폐단은 교회 분열이후 지금까지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잘나타나고 있으니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수백개로 갈라져 있는 그들의 모든 종파가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서로의 진리 해석이 달라서 갈라진 교회 모두가 같은 하느님의
참 진리를 증언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성경의 자유해석을 할 수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예로써, 2베드 1.20.....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사도 8,30-31.......... 등 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수 있다.
처음 교회에 온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성경을 불쑥 내민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소화 시킬 수 있겠는가?
성경은 수천년전 지금의 우리와는 사고방식과 문화, 삶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현대어와는 다른 고대어로 쓰여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다른환경의 바탕위에 쓰여진 성서를 현대인의
사고로 현대인의 언어적 감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을 올바른 해석이라 할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예비신자들에게 성서를 주지않고 성서에 나타난 교리를 간추려서 만든 교리서를 먼저 준다.

(성서자유해석의 오류에대한설명) ※예비신자에게 꼭 해야된다.
인간의 말이란 시대에따라, 삶의 상황에 따라서 그의가 완전히 달라짐을 볼 수있다. 현대의 유행하는 은어들이 수천년 후에도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고 할 수는 없다.
요즈음 좋은 예로 불과 몇 년전만 해도 부부간에 자기 자기 하더니 요즈음 젊은 부부들은 남편 더러 오빠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가톨릭은 성전을 바탕으로 성서를 해석하나 개신교는 성전을 부정한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가르치지는 않으셨다. 또한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이 따라다니며 받아쓰며 기록하지도 않았다.
신약 역시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10여년의 세월이 흐른후에야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4복음서의 마지막 복음인 요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있다. 요한복음 마지막 절 기록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이렇게 기록되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예수의 말씀을 성전이라 한다.

기록되지 않은 구원의 말씀은(Ⅱ디모테오 2,13)--나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 --글보다 말의 중요성 강조.
그리고 실제 쓰여진 성경이 오늘날 분실된 것이 많다. (골로사이 4,16)--여기서 라오디케이아 서간도 있음을 알수 있다.
또 Ⅰ고린토에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여기서 고린토 서간이 하나 더 있음을 알수 있다.
실질적 면에서 볼 때 가톨릭이나 그리스도를 표방하는 모든 개신교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서 일요일이 주일이라는 근거는 없다.
성경에는 안식일을 주장했고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을 신약시대의 중심일로 생각하고 사도들이 정한 것이다.
이런 전통은 가톨릭에서가 아니면 어느 종파에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밖에도 연옥설, 성령께 대한 기도, 유아세례의 전통 등, 성경에 불투명하게 되어있는 것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것이 곧 성전이다.
개신교에선 성전을 완전히 부정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전의 요람은 가톨릭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중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 일반적으로 마르코 복음이라 하는데 이 복음은 적어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후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전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오로지 성전 뿐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이 입으로만 전해오던 것을 후에 기록한 것이 성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원은 성전이다.
성전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연 성경도 부정한다는 결론이다. 또한 성전은 이러한 전통과 전승의 의미만이 아닌 2000여년간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온 역사를 뜻한다.
즉 성전은 교회의 전통과 전승, 그리고 성서의 해석의 역사를 말한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루터를 비롯한 종교 혁명가들에게 종교 분열의 빌미를 준 것이 가톨릭 일부의 부패가 한부분임은 인정되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그러한 부패에 대한 개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
정통 교리를 개인의 사상에 비추어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이없다.
그들은 성경과 전통, 말씀과 성사, 신앙과 선행, 가정생활과 수도생활 가운데 전자는 골라잡고 후자는 버리거나 소홀히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들은 제 좋을대로 하는
경향이 강하다하겠다.
물론 나 자신이 가톨릭인 만큼 가톨릭을 옹호하는 입장이라 그들을 비판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의 객관적으로 보드라도 양자를 모두 수용하는 가톨릭은 글자 그대로 보편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냉정히 이야기해서 개신교의 신앙은 신앙의 가치체계 가운데서 어느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우열을 가릴 줄 안다.
즉 신앙의 중심을 잡을 줄 아는 것이 개신교의 장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장점이 또한 단점이 된다. 그것은 신앙현상과 인생현상 전체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한쪽만을 강조(sola scripture 오직성서, sola fide믿음, sola gratia은혜)하다보니 편협하다는 생각이든다.
개신교는 독선적이고 배타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가톨릭은 신앙과 인생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수용 그 폭이 넓은 것이 장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 저것 수용하다보니 신앙의 핵심을 놓치는 수가 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들여다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은 구교라서 구태의연하고, 개신교는 신교라서 참신하다 하는 것은 이미 옛말이다. 가톨릭이 개신교 쪽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문화 친화적이다.
이제는 이러한 서로의 장단점을 조화롭게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의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어떻던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인 교회로 일치의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가 분열된지 5세기가 지난 지금, 저들이 외친 교회개혁을 가톨릭이 귀 기우리고 수용했드라면 분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역사상 교회가 미리 깨닫고 미리 개혁한 사례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이 결코 역기능적 역할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분열이 가져온 긍정적인 면이라면 그리스도 신앙의 이해와 실천의 다양성이라 하겠다. 만약 이러한 분열이 없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획일적 신앙 이해와
실천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위 종교혁명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개신교의 현실을 보면 그들 역시 복음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개신교 모두 교회는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진해야 할 것이다. 서로가 예수님 공부와 예수님과의 일치에 서로 경쟁한다면 갈라선 보람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덧 붙여 이러한 개신교의 주장들은 교회의 팽창을 위해선 긍정적일수 있다. 또한 말씀과 성사의 전권이 성직자에게만 있는 가톨릭은 신앙의 단일화를 위해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리상의 문제나 성서 해석의 상반된 견해들을 조정하여 줄 조정자가 없으므로 끊임없는 분열을 하고 있다.
우리 교회가 단일교회를 이루고 일치속에 살아 갈 수 있음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여줄 조정자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긍정적인 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주관적이고 비판적이었다면 너그러이 용서바랍니다.
이글이 교회 일치의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글은 생활 성서와 교리 신학원 강의록, 그리고 본인의 주관적인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

-끝-